아픈 역사가 흐르는 홍주의사총과 홍주 의병기념탑을 찾았습니다.
처음에는 구백의총이라 불리었는데 "2001년 8월 17일 국가지정문화제로 지정받으면서
이름을 홍주의사총으로 바뀌었으며 매년 6월1일에 순국의사에 대한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홍주의사총 입구
홍주의사총은 사적 431호로...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의병들의 항일구국운동 가운데
제일 규모가 크고 가장 치열한 항전을 벌였던 홍주읍성
전투에서 희생된 의병들의 유해를 모신 묘소"라고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문화관광해설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안내를 받을 수 있고,
휴무일은 매주 월요일이니 참고하세요.
열려있는 창의문을 통해 의사총 묘역으로 들어갑니다.
홍주성 전투에서 일본군과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다 희생된 의병들의 유해를 모신 묘소입니다.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우다 순국한 의병들의 묘역 앞에서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묘소 바로 옆으로 망주석이 세워져 있고, '병오순난의병장사공묘비'는
"1906년 윤달 4월 9일 밤 왜군이 홍주의 동문을 공격하여
우리의 의병들이 출격하여 맞서 싸웠으나 새벽에 모두 전사하여...
이 일을 홍주에서 일어난 병오년의 일이라 한다"는 것으로 상세히 적어놓은
병오년 홍주의병에 대한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묘소 봉분 앞에서 뒤돌아보니 창의문 지붕 너머로 홍성 읍내가 내려다 보입니다.
잔디와 나무의 조경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는
정원수 같은 소나무들이 의사총을 지켜주고 있습니다.
의사총 묘역을 들러보고 호젓한 천년여핼길을 따라 걷다 보니
창의사로 들어가는 진충문은 닫혀있습니다.
진충문은 잠겨있어서 진충문 오른쪽에 홍주성 천년여행길 15번을 안내하는 표지판 따라
작은 문으로 나가면 홍주 의병기념탑을 만날 수 있습니다.
진충문이 닫혀 있는 관계로 담 너머로 창의사를 바라보기만 합니다.
창의사 옆 길을 따라 조금 오르다 보면 홍주의사총 뒤에
2013년 건립된 '홍주의병기념탑'이 위치해 있습니다.
홍주의병기념탑 준공비
"내포의 중심지이자 충절의 고장인 홍성(홍주)에서 거병하여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산화하신
홍주의병의 숭고한 넋을 기리고 고인들의 우국충정과 살신성인의 정신을 되살려
후손들을 위한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자 홍주의병기념탑을 건립하였습니다.
기념탑은 삼재(하늘, 땅, 사람)를 의미하는 기본구도 위에, 홍주성과 월계천, 홍성천을 형상화 한 기단/
거병년도(1895년, 1906년)를 담은 두 개의 탑신/홍주의병을 상징하는 인물상과 부조/
홍성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소통하는 구와 문주/홍주의병사를 기록한 기념비 등을 조형화하여
홍주의병의 호국정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념탑 건립을 계기로 홍주의병의 역사를 후손들에게 널리 알려,
나라사랑의 산 교육장으로 삼고 항시 추모하는 마음과 공경하는 자세로 참배할 수 있도록 하였으니,
고향을 굽어보는 배산임수의 평화로운 이 땅에서 편안히 영면하시기 바랍니다."
2013. 2. 28.
건립 홍성군수 김석환
조각 목원대학교 교수 이창수
일본군과 맞서 싸우기 위해 각자 깃발과 무기로 무장한
의병들의 그 당시 모습을 형상화한 홍주의병의 고장 홍성이 자랑스럽습니다.
조국을 지키기 위해 산화하신 홍주의병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며
그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깊이 새기며 뜻깊은 시간이 되었습니다.
홍주 의병기념탑을 마주하고 있는 태극기 조형물 '충혼(忠魂)'입니다.
"忠魂(충혼) : 그 숭고하고 아름다운 영혼
겨레를 위해 일제와 맞선 홍주의병(洪州義兵),
그 영원한 사랑 겹겹이 쌓인 ‘홍주의병기념탑’을 마주한다.
이제 옷깃을 여미고, 그 의(義)로운 마음결을 되새기며..." 라고 설명이 쓰여있습니다.
이 둥근 구슬 모양의 조형물은 홍성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소통하는 구라고 하는데... 나의 모습도 담아내고 있네요.
벽면에 그려진 홍주의병들의 당시 모습이 그날의 아픈 역사를 되돌아보게 합니다.
기념탑 벽의 뒷면에는 '홍주의병사(洪州義兵史)'라고 하는 홍주의병 개요,
전투일지, 이후의 황동, 의병 편지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홍주의병사(洪州義兵史)
홍주의병 개요
홍주의병 김복한을 중심으로 1895년에 봉기한 제1차 홍주의병은 척왜분위기를 고조시켜
을미의병을 전국적으로 확산케 하였으며, 의병대장 민종식을 중심으로 1906년에 거병한 제2차 홍주의병은
일본군과의 홍주성전투에서 수백명이 산화하여 단일전투로는 의병항쟁 사상 최대 규모의 희생자를 내는 등
홍성군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의병항쟁의 중심지로 우뚝 서 있습니다.
특히 일본군과 국권회복을 위해 싸우다 장렬히 산화한 제2차 홍주의병 수백여명의 유해가 모셔진
홍주의사총(구백의총)은 의병항쟁 유적지로는 보기 드물게 지난 2001년 8월 국가사적 제431호로 지정되어
홍주의병항쟁의 역사적 가치와 중요성을 인식시켜 주고 있습니다.
이렇듯 역사적으로 매우 귀중한 가치를 지닌 홍주의병항쟁이 부각되지 못하고
급격한 도시발전과 세월의 흐름에 가려져 잊혀져가고 있어 홍주의병항쟁의 정신을 되살릴 수 있도록
홍주의사총 부지 내에 홍주의병기념관을 건립하여 호국선열의 넋을 기리고 고인들의 유지를 계승하고 발전시켜
홍성군민들의 자긍심을 함양하고 홍성군의 정체성을 재정립하여 후세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자 합니다.
홍주의병 전투일지
1906년 3월 15일 정산 천장리(현 청양군 정산면 천장리)에서 의병 봉기, 홍주공격 시도,
3월 16일 공주 공격계획에 따라 화성 합천(현 청양군 화성면 합천)으로 이동,
3월 17일 일본헌병대와 홍주관군들의 공격으로 의병진 와해,
5월 9일 홍산군 지치동(련 부여군 내산면 지티리)에서 의병 재봉기, 홍산 관아 점령.
5월 13일 서천 비인 경유하는 5일간의 전투 후 남포성 함락, 남포군 병사 31명 및 유회군 33명 의병 합류.
5월 19일 결성 유숙 후 홍주로 진격 홍주성 점령. 일본 헌병 덕산방면으로 도주.
5월 20일 홍주성 점령 후 신보균, 신현두, 이식, 안항식, 김상덕, 유호근 등이 합류, 의병진 재편.
5월 20일 공주주둔 일본 경찰, 헌병대 홍주성 공격, 패퇴.
5월 21일 일본 경찰대 경부, 보좌원 순검 13명 홍주성 공격, 대흥으로 패퇴.
5월 22일 서울 경무고문부의 일본인 경시, 순사 등 총 21명, 홍주성 공격위해 증파.
5월 24일 서울에서 증파된 21명과 공주 경무진위대 파견 조선병 57명 홍주성 공격, 패퇴.
5월 27일 홍주의병 일본경찰 일본인 3명, 일진회원 2명 체포(5월 29일 밤 처형).
홍주의병 진압 위해 공주진위대 20명, 청주진위대 위관 1명, 병정 50명 파견.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 조선주차군 사령관에게 보병 2개중대 홍주파견 명령.
5월 29일 곽한일, 남규진 의병부대(약 400명) 홍주성 입성.
5월 30일 일본군 보병 2개 중대(약 400명) 기병 반대 소대 전주수비대 1개 소대, 홍주성 포위.
5월 31일 오전 2시 30분경, 일본군 홍주성 공격, 3시경 일본 기마병 폭파반 동문 북문 폭파,
보병, 헌병대, 경찰대 성안 진입. 7시 반경 시가전 후 일본군에 의해 홍주성 전체 점령. 홍주의병 수백명 이상 전사.
8월 6일 유준근, 최상집, 이상구, 안항식, 남규진, 신보균, 이식, 문석환, 신현두(홍주 9의사) 대마도 유배.
홍주의병 이후 활동
1906년 5월 차상길 당진 소난지도에서 의병투쟁. 6월 이세영 체포.
1908년 유배 방면 후 애국계몽운동 전개. 7월 이용규 청양 추티에서 의병 재봉기.
10월 이용규 예산 현곡(현 예산군 대술면 상항리) 이남규 자택에서 민종식 등과 의병 재봉기 협의.(11월 20일, 예산 공격계획 수립)
11월 홍순대, 부여군 은산면 의병 80여명 규합하여 의병활동 전개.
11월 17일 곽한일, 박윤식, 이석락, 이남규, 이충구, 일본헌병, 지방병, 일진회원의 습격으로 체포.
11월 20일 김복한, 홍주의병대장 민종식과 의병봉기 논의로 구속되었다. 11월말 방면.
11월 20일 민종식 체포, 공주부로 이송 뒤 서울로 압송.
1907년 1월 맹달섭, 부여군 일본인 가옥 습격, 일본인 3명 사살.
2월 21일 맹달섭, 경기도 죽산의 쌍령으로 이동 활동. 5월 7일 맹달섭, 당진주재소 습격.
7월 3일 민종식 교수형 선고, 7월 4일 종신유배형 선고
9월 이남규, 이충구 부자 일본기마대에 체포되어 압송 도중 귀순거부로 온양 평촌(현 아산군 송악면 평촌리) 냇가에서 학살.
10월 김복한 보령군 순사보조원과 순검에게 구금.
12월 안병찬, 박창로, 정산(현 청양군 정산면)의 칠갑산 부근에서 항쟁하다 일본 헌병대에 체포.
이만식, 당진, 해미, 대흥, 서산, 부여, 공주, 경기 안성, 용인, 죽산, 양성에서 활동.
1908년 3월 11일 맹달섭, 청양군에 은신해 있다가 체포. 1909년 7월 김동락, 김무경 일본헌병대에 체포.
1911년 이세영, 만주 망명 후 신흥무관학교 교장과 통의부 군사위원 겸 사령장 등 역임.
1915년 7월 김한종, 장두한, 신현두, 성달한, 윤병일, 성문영, 유창순, 한훈, 항일비밀단체인 대한광복회 설립 조도.
1919년 3월 김복한, 3.1운동 발발 계기로 안병찬, 김덕진, 전양진, 임한주 등과 함께 파리장서운동 전개.
홍주의병 편제
대장 : 민종식 ,군사장 : 김상덕, 참모장 : 김광우, 조희수, 채광묵, 중군장 : 정재호, 황영수, 이세영.
유격장 : 채(최)경도, 김광현, 윤상배, 이만식, 좌군장 : 윤필구, 윤병일, 송순목, 우군장 : 이병년, 이범구, 홍순대
소모장 : 지우범, 박두표, 최상집, 신석휴, 김윤식, 소모관 : 이만식 수문장 : 최선재 수성장 : 최졍순
선봉장 : 이남규, 박영두, 후군장 : 정해두 서기 : 문석환 군량관 :성재두, 박제순 향관 : 박윤식,
좌익장 : 이상구, 김성진 우익장 : 신현두, 이봉규, 참모 : 안병찬, 박창노, 안항식, 신보균, 이용규
유병장 : 유준근 유병소향관 : 민정식 참모사 : 이식 돌격장 : 남계원(남규진), 안병림, 곽한일
2013년
건립 홍성군수 김석환
조각 목원대 교수 이창수
홍주의사총 화장실 벽에... "1905년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전 이조참판 민종식 의병대장 중심으로 1906년 홍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발하게 활동을 펼치고 있는 병오 홍주의병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홍주의병들이 일제를 물리치고 홍주성을 탈환하던 모습을 재현해 그려놓았습니다.
그 아픈 역사에서 벗어나 밝은 미래를 준비하는 홍주천년기념탑으로 이동합니다.
(홍주의사총 가는 길 : 충남 홍성군 홍성읍 의사로 79)
홍주천년 기념 상징조형물인 '홍주천년기념탑'은 홍주문화회관 바로 앞 회전교차로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
홍주문호회관 바로 옆 나무데크로 된 전망대 올라보니 전봇대와 전기줄이 시야를 가려서 좀 아쉬웠지만 한컷 담아봅니다.
홍주천년을 맞아 홍성에 세워진 홍주천년기념탑은
기다랗게 세워진 안내판에 기념탑에 대한 설명이 간단하게 적혀 있습니다.
"홍주이름사용 천년의 해를 기념하는 상징조형물로 홍성의 지도, 조양문의 처마 곡선,
오관리 느티나무를 모티모로 사용하여 홍주를 지켜주는 수호신을 표현하였고,
기념탑 상판은 홍성의 지도를 꽃 한송이 꽃잎으로 표현하여 각 읍, 면의 대표적인 인물과
자랑거리를 넣어 홍주천년을 기릴 수 있도록 하였고,
기념탑 중심부에는 홍주의 천년역사 속 시간이 흐르는 모래시계로 비유하여 형상화하고,
탑 상부를 떠받치고 있는 4개의 기둥은 애국과 민족운동에 앞장섰던
홍주 위인들을 표현하여 과거 홍주의 모습을 담아냈다고 합니다.
기념탑 하부는 현재의 홍성군의 여러 자료와
소망 편지 등을 담은 타임캡슐을 매장했다고 합니다.
바닥 부분은 홍주지명 천년을 뜻하는 1000이라는 숫자가 태양을 향해
비상하는 홍주천년 엠블럼으로 홍주의 미래를" 담았다고 합니다.
희망찬 홍성을 상징하는 홍주천년기념탑입니다.
홍주라는 지명을 쓰기 시작한지 천년이 되었다는 뜻깊은 천년의 해를 맞은 2018년에
홍주의 천년 역사를 기념하고 앞으로 새 천년을 밝힐 '홍주천년기념탑'이 2018년 건립되었습니다.
이곳은 1906년에 을사늑약에 반대한 홍주의병들이
일본군과 치열하게 전투를 벌인 역사의 현장이기도한 홍주성의 동문인 조양문입니다.
새 천년을 꿈꾸는 홍주의 미래가 무한한 발전과 영광이 있기를 바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