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결이 선선한 가을 문턱에 들어섰음을 느끼게 하는 가을 초입에 설악산 백담사, 오세암 내설악 만경대, 오세암 탐방 트레킹에 나섰다.
백담사를 가기 위해서는 용대리 백담주차장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백담사까지 이동해야 한다.
백담 주차장 가는 길 : 강원 인제군 백담로 96
<백담주차장 요금>
3시간 기본 3,000원
3시간 이후 가산 요금은 시간당 1.000원씩 추가
승용차 기준 1일 최대 8,000원
<2023. 9월 기준, 셔틀버스 운행시간과 요금>
상행 첫차 오전 7시
상행 막차 오후 6시
하행 막차 오후 7시
셔틀버스 요금(성인) 편도 2,500원
백담마을 버스 운행 배차 간격은 30분이지만, 만차인 경우 시간에 상관없이 바로바로 출발하지만 앞차 출발 후 만차가 되지 않는다면 최대 30분까지 기다릴 수도 있다. 버스에 탑승하고 백담계곡을 따라 7km 정도를 아슬아슬한 포장도로 약 15분 정도 올라간다. 따라서 버스에 탑승하고 올라갈 때, 운전석 뒤쪽 라인(왼쪽)창가에 앉으면 창밖으로 백담계곡의 풍경을 보며 올를 수 있다. 반대로 내려올 때는 오른쪽에 않는 걸 추천!
백담사 만해 한용운(1879~1944)님의 위대한 기념관을 찾아서...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 경성면 성곡리 향리에서 한응준 공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한용운 그는 어린 시절 6세 때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며 민족 지도자의 자질을 닦았다.
18세 때 동학농민 운동에 뛰어들었으나 실패하자... 1896년 의병 실패로 몸을 피해 고향을 떠나 피신하여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감. 그 뒤 1905년 백담사 김연곡스님을 은사로 하여 득도하여 승려가 되어 구도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 후 오세암, 건봉사에서 정진하여 불제자로서 사상의 깊이를 더했다.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여 체포돼 3.1운동 주동자들 중 최고형 3년간 옥고를 치렀다.
만해 기념관은 한용운 선사의 연보와 불교대전, 님의 침묵, 각종 도서, 친필, 유묵들을 둘러볼 수 있는 위대한 만해정신의 산실을 만나게 된다. 만해 한용운 선사가 조국 역사에 남긴 발자취는 크고 뚜렷하게 빛나다. 만해 한용운님은 독립운동가로서뿐만 아니라, 불교의 대중화에 힘쓴 개혁자로, 사상가인가 하면 시인으로 작품 활동을 계속해 오다가 1944년 6월 29일 조국 광복을 한 해 앞두고, 그토록 염원했던 조국의 독립은 끝내 생전에 보지 못하고 향년 66세에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셨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됨.
南國黃花早未開(남국황화조미개) 江湖薄夢入樓臺(강호박몽입누대) 鴈影山河人似楚(안영산하인사초) 無邊秋樹月初來(무변추수월초래) "남국의 국화꽃 채 피지 않고" "강호에 노는 꿈이 누대에 머물렀네" "기러기 그림자가 산하에 인간의 형상처럼 비추고" "가없는 가을 나무 사이로 달이 뜨네" |
兩岸寥寥萬事稀(양안요요사사희) 幽人自賞未輕歸(유인자상미경귀) 院裏微風日欲煮(원리미풍일욕자) 秋香無數撲禪衣(추향무수박선의) "두 언덕이 아득하여 희미하니" "그윽한 사람의 마음을 바라보며 쉽게 돌아오지 못하누나" "절속에 미풍은 불고 해가 타는 듯 한데" "가을 향기 무수히 선의를 때리누나" |
민족 독립운동의 선봉에 섰던 만해 한용운은 역사에 빛나는 불꽃으로 남다.
1919년 3월 1일 계동 43번지에서 2시 정각 태화관에서 독립선언 연설 “조선 독립 만세!”를 삼창 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파고다 공원에서 군중들이 돌립 만세를 제창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키는 듯했고, “조선 독립 만세!”를 목이 터져라고 고창했다. 독립 만세의 절규는 온 시가에 번졌다. 서울 장안을 비롯하여 조선 팔도가 말 그대로 독립 만세로 흔들렸다. 독립선언 연설 후... 당황한 일본 관헌들이 일제히 달려왔다. 정사복 순사와 헌병 7.80명은 일제히 태화관을 애워쌌다. 이때가 오후 5시경이었다. 29명의 독립지사들이 차 한 대에 세명씩 차례로 연행되어 ‘경시 총감부’ 헌병대 사령부로서 경찰의 총기관이었다. 몇 차례 취조를 마치고 난 민족 대표들은 4, 5일 뒤에 마포 경찰서를 거쳐 서대문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역사에 길이 빛날 3월 1일의 민족 항쟁은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 각처를 누볐다. 이에 평화적 시위를 저지하는 일제의 탄압은 무자비했다. 이에 일제는 잔악성과 혹독한 고문으로 수많은 시위자들의 생명을 끊었고 혹은 불구자로 만들기도 했다.
- 임중빈님의 <만해 한용운> 중에서 -
백담사는 내설악에 있는 대표적인 사찰로 한용운의 "백담사 사적기"에 의하면 서기 647년 신라 제28대 진덕여왕 원년에 자장 율사가 설악산 한계리에 한계사로 창건하고, 아미타삼존불을 조성 봉안 한 후... 전설에 의하면 백담사라는 사찰의 이름은 설악산 대청봉에서 절까지 작은 담이 100개가 있는 지점에 사찰을 세운 데에서 1783년(정조 7)에 최붕과 운담이 백담사라 개칭한 것이 지금까지 백담사라는 이름이 불리고 있다고 한다.
팔만대장경 봉안 역사를 품은 천년 고찰
오세암은 설악산 백담사에 속한 암자로 백담사에서 약 6㎞ 떨어진 곳에 영시암을 거쳐 가는 설악산 자락의 깊숙한 품에 자리하고 있다. 643년(선덕여왕 12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하여 관음암이라 하였다. 그 후 1643년(인조 21)에 설정이 중건한 다음부터 다섯살의 동자승이 폭설에서 고립된 암자에서 관세음보살의 도움으로 살아남았다는 아름다운 전설이 내려오는 이후부터 ‘오세암’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하는 전설이 전하고 있다.
만해 한용운 오세암에서 대장경을 만나다
오세암에 팔만대장경 인경본이 봉안된 지 30여 년이 지난 1896년에 한용운이 동학농민 운동에 뛰어들었으나 실패로 몸을 피해 피신하여 오세암에 들어왔다. 이후 그는 1905년에 백담사에서 출가하고 오세암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만해 선생의 불교사적 업적과 문학사상이 싹 틔워진 것은 오세암에서 팔만대장경을 접하고, 만해 한용운을 스님으로, 시인으로, 그리고 독립운동가로 역사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팔만대장경"을 봉안하였던 대장전 인경본은 안타깝게도 6.25 전쟁 중 화재로 모두 소실되어 이른바 "인경본"이 오세암에 봉안됐던 역사적 사실을 홍보하기 위해 세워진 팔만대장경홍보관 건물이다.
오세암에서 하산하는 길... 몸도 마음도 가볍게 숲의 바람과 나뭇잎이 싱그럽고 찬란한 자연의 경이로움을 만끽하고, 님의 깨달음을 얻으며 역사가 깊이 담겨있는 만해의 위대한 정신을 엿볼 수 있는 하루였다.
[부록]
홍성에서 만나 보는 한용운선생 생가지
독립운동가이자 승려이며, 시인인 만해 한용운 선생이 태어난 곳으로...
1989년 12월 29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75호로 지정.
충남 홍성군 결성면 만해로318번길 83